2021. 3. 14. 01:41ㆍ카테고리 없음
카게야마 토비오에게.
이렇게 펜을 잡고 글을 써보는 건 오랜만이네. 너야 소식을 바깥에서 접할 수 있으니 딱히 안부는 묻지 않을게. 이탈리아로 떠난다는 소식에 편지했어. 거창할 것도 없지만, 네가 비행기에서 내릴 때 즈음에 같이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네. 카게야마, 무슨 말로 시작하면 좋을까. 일단 난 아마도…… 잘 지내. 나름 그렇다 할 직장도 구했고, 무심하게 지나는 시간을 따라먹는 나이에 따라서 새로운 취미도 만들곤 했으니까. 이따금 우리가 처음 만난 중학교 시절이 떠올라. 아, 그때의 넌 얼마나 배구에 미쳐 있었는지. 네가 배구 선수가 될 거라고는 충분히 예상했지만 프로 리그에서 뛰는 생경한 모습을 보니 또 감회가 새로워. 사실 난 배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아. 팔 뻗으면 그게 리시브가 되고, 팔 올려서 내리꽂으면 그게 스파이크가 되는 건데… 뭐가 이리 복잡한지. 매일 네가 올리는 그 토스에 죽어나는 킨다이치나 한 발짝 물러나 있던 나도, 그리고…… 그 순간의 토스에 온 열과 성을 갈아 넣은 너도. 우리 너무 복잡하게 살았던 것 같기도 하고.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퍽 웃기지만… 한번쯤은 말하고 싶었어.
난 네가 부담스러웠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던 네가 공만 손에 쥐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오는데…. 네 열정을 피차 외면한 날 용서해. 내가 너무 안일한 탓이었어. 어차피 내게 네 토스가 올라올 거, 그거 하나만 믿고 그 소름 끼치게 정밀한 토스를 칠 수 없었다는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널 밀어낸 날.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줄만 알았던 네가 서서히 멀어지는 게 너무 어색하게 느껴지더라. 배구부에 함께 있어야 할 세 명이 없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우리가 다른 체육복을 입고, 다른 동료와 함께 다른 플레이를 하는 그 자체가 너를 바라보는 내내 날 옥죄어 자꾸만 중학교 시절이 떠오르게 하더라.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싶다가도 다시 너와 함께하고픈 마음을 숨기지도 못하고 비겁하게 글로 늘어놓는 날 용서해. 삶은 늘 회전하며 인연을 구석구석 정비한다고도 하는데, 너와의 관계를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쯤 올까. 틀어진 채 삐걱이는 톱니바퀴 마냥 귀에 생생한 네 목소리가 들리면 애닳는 마음에 잠을 못 자겠어. 그때 네게 진심으로 사과했다면, 네게 세이죠로 오라고 했다면…… 죄 헛된 망상이지. 네가 시라토리자와에 입학 시험을 보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쉬움을 넘어 조금은 원망스러웠어. 그 성격 주제에 피하지 말고 당당히 맡설 것이지, 왜…… 피하려 드는지. 말은 못하면서 자꾸 마음만 삐뚤게 나갔어. 참, 자꾸 글씨가 흐트러지는데… 적당히 잘 봐주라. 이 정도 일본어는 이제 읽을 줄 알잖아. 아, 그리고 무엇보다… 킨다이치가 널 많이 보고 싶어해. 그 애도 분명 함께 했던 시간을 그리워하는 것이 분명하겠지. 짜증 날 정도로 정밀했던 그 토스에 오금 저려하던 게 누군데. 꽤 웃기지만, 역시 나도 같은 마음이라 딱히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진 않네. 가끔 네 토스를 탐냈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 이름 모를 중등부 후배들, 그리고 인터하이를 중계하던 작고 낡은 브라운관으로 흘러나오는 낯선 선수들의 이름, 고등학교를 이어 프로리그에서도 수없이 쏟아 나오는 유명한 선수들의 이름들……. 괜히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에 고등학생 시절에는 그 자리를 떠버리거나 텔레비전을 아예 꺼버리기도 했어. 네 입에서 그들의 이름이 나올때마다 자꾸 우리가 삐걱이던 그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 온 머릿속이 어지러우니까. 시간은 자꾸 흘러가기만 하는데 나는 어째서 그 기억에 사로잡힌 것 마냥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걸까, 카게야마. 겨우 네 글자를 쓰는 주제에 저릿한 기분이 드는데, 내가 오랜만에 펜을 잡고 이렇게나 많은 양을 써서 그런지, 아님… 그냥 너를 보고 싶어하는 내 마음이 제법 요란하게 구는 건지. 너는 분명 '우리'가 심어준 고독한 제왕의 비루한 껍데기에서 탈피했지만 정작 나는 여전히 죄책감일지, 혹은 그저 침잠하는 미련에 타들어가는데, 이런 꼴이 참 한심해. 잡을 수도 늦출 수도 없는 널…… 내가 어떤 연유로 잡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
네 토스의 이유가 나였으면 좋겠어. 네 토스던지, 네 배구던지. 그 입에서 내 이름이 불리길 기대하는 그 어릴 적의 풋풋한 마음을 다시 되찾고 싶어. 내가 가장 배구를 즐겼던 순간은 네게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은 미소를 세이죠의 동료들 앞에서는 헤프게 퍼줬던 짧고 사소한 복수였다는 것이라고 분명 믿었지만… 역시 우리가 함께였을때, 네 본질이 온전히 나, 그리고 우리라고 칭할 수 있었을 때가 내 생애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나 봐. 내 부활동의 본질이 자꾸만 너를 향한 화살을 쏘는데 집중하게 되자 완전히 흥미를 잃은 걸지도. 어차피 단 하나도 명중하지 못한 채 그 화살을 쏘기 위해 남은 흉터만 날 괴롭히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나…… 네게 돌아오란 말은 하지 않을게. 우리가 마주해 말을 섞고 함께 땀을 흘려가던 시절이 그리워. 눈물이 날 정도로 미숙했던 우리의 청춘을 되잡고 싶어. 난 여전히 너를 좋아하니까. 너의 배구를 좋아하고, 네 열정을 사랑하니까. 어울리진 못하더라도 곁에서 관전하기만 하게 해 줘. 너 하나만 바라보며 토스를 원하던 그때의 마음을 되찾고 싶어. 너는 언제나 모두에게 둘러 싸여있으니까, 나 하나쯤은 그냥 이기기 위한 말로 생각했을 법도 하지만… 우린 아니니까. 너 하나만, 우리의 제왕 하나만 바라보며 언제나 널 열망하고 원했어. 이젠 손을 뻗기는 커녕, 아득히 닿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한 널 다시 바라보고 싶어.
난 너만 좋아했어. 배구부 중에서 마음에 드는 놈 하나 없이 너만 좋아했다고. 고독하게 남아버린 널 측은하게도 생각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는 미숙한 중학생의 추악한 변명을 들어줘. 네가 나한테 누굴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는 심란했어. 처음 본 순간부터 난 너만 있었는데…… 세상 돌아가는 심정에 어두운 네가 뭘 알겠냐는 말도 퉁명스럽게 건넸지만, 여전해. 여전하다고.
언젠간 네 세 글자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동사로 꾸미고 싶어.
이 편지는 답장하지 말고 태워. 어차피 이 소망은 네가 배구를 싫어하는 날이 오더라도, 내가…… 널 사랑하지 않을 날이 와도, 이루어지지 못할거니까. 우리의 삶에 너와 날 모두 태울 수 있는 회전목마가 돌아오면 다시 만나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여전히 그때도 널 마음 속 어딘가 품고 살아가고 있을 테니.
쿠니미 아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