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30. 23:46ㆍ약한영웅
난 얼마 안 돼서 구석에 놓여 네 낡은 껍데기만 먹으면서 살겠지만 실은, 나는 내 가치를 묻는 질문조차 내게 사치라 느껴지는데. 어때, 애정은 바보처럼 퍼주는 게 현명하다고 그랬는데 맞는 말 같아? 너 똑똑하잖아. 사랑놀음을 논하지는 않을게. 주제넘지 않게 네 뒤에서 네 목소리를 귓가에 똑똑히 새기고 네 옆에서 수학 문제를 풀이하는 네 손놀림을 확실히 익힐 테니까, 옆에 있게만 해주라. 은장 백사의 충실한 피식자 금성제가 될 테니까, 그냥... 응.
왜 말에 대답을 안 하냐. 난 지금 가차 없이 날 이용해도 상관 없다는 말을 하는데.
그때의 현장에서 옥상이라는 허물을 먹어치운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당사자는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너에게 연합을 타파할 정보를 줄 테니 자신에게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그 어울리지도 않는 안경을 고쳐 쓰며 무미건조한 눈으로 말하길래, 어느 정도 희미해진 살기 담은 눈빛이라 괜히 신뢰가 갔다. 고탁은 그게 못마땅하다듯이 인상을 쓰며 무슨 꿍꿍이냐 되물었지만 대답은 그냥. 한 마디뿐이었다. 그런 점이 가끔은, 그때 보았던 합당한 허세를 나 덕에 청산했다고 증명해오는 꼴과도 같다는 느낌이 들어 알겠다고는 했다. 물론 아무 계획, 아무 목표도 없었으나 금성제는 그저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내게 모순적인 사정을 해왔다.
평소에는 내 공부를 하느라 바빴으나 연합을 상대하면서 조금은 빠듯해진 그런 시간에 금성제를 가르치는 건 조금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치켜 올린 안경이 무색하게도 중학교 수준의 수학도 못했고, 어휘력은 초등학생 수준에, 영어 글씨는 곧게 뻗은 손가락이 어울리지 않게 완전한 악필이었다. 도대체 무엇부터 가르쳐야 할지 꽤나 막막해서, 일단 바로 다음 주에 예정된 모의고사부터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에 집힌 아무 책을 금성제에게 던졌다. 그 책이 하필이면 동물 백과라서, 금성제는 내가 꼬박 70분간 2014년 11월 모의고사를 푸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그 책을 정독했다. 그중 뱀에 대한 부분은 아주 불을 켜고 읽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모의고사를 푸는 게 먼저 끝났다. 어디까지 읽었냐 물었더니 파충류에 대한 부분, 특히 두껍게 접혀 있는 책의 한 페이지를 가리킨다. 뱀에 대해서 자신이 좀 읽어봤는데 탈피라는 과정은 신기한 것 같다고 다시금 그 살기 잃은 눈으로 내게 말한다. 하지만 그 눈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 그 시선이 마치, 안수호라는 나의 영원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허물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 같아서. 내 안의 안수호라는 애정 어린 존재를 끄집어내는 것 같아서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금성제는 허탈한 웃음으로 은장 백사도 탈피를 하나? 물어온다. 실없는 미소가 터져 나와 숨기지는 못할 것 같아서 그냥 보여줬더니 저도 활짝 웃어 보이는데,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첫 수업은 끝났다.
계속해서 금성제는 매일 11시 즈음에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덕분에 내 방에는 금성제가 남기고 간 꼬불꼬불한 수학 문제 풀이 노트 조각이나 영어 단어를 애써 외워 좋아하던 그런 모습이 잔뜩 묻었다. 날이 갈수록 분위기가 묘해졌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금성제는 샤워를 한 멀끔한 상태로 내 침대에 누워 영어단어 스무 개 정도를 외웠고 나는 그 사이에 풀리지 않던 수학 킬러 문항을 풀었다. 그러고 나서는 함께 중학 3학년 1학기 쎈을 꺼내와 함께 B단계 문제를 스무 개 정도 풀었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좀 하다가 그렇게 두 시 정도가 되면 금성제는 돌아갔다.
금성제는 가끔 이런 질문을 했다. 수재는 왜 은장을 오나. 천재들은 과학고를 가는 게 아니냐는 그런 허공에 떠도는 말들. 괜히 안수호가 생각나 심란한 표정으로 대답한 듯 싶었다. 그 살기 없는 눈은 괜히 집요해서 나한테 물어온다. 중학교 때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고. 딱 표정이, 무슨 일이 있다는 걸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고. 괜히 그 집요함이 불쾌해 금성제를 노려보았더니 금성제는 평소에 내 머리를 어루만지던 습관에 대한 잔소리를 잊었다듯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뚱한 표정 짓지 말고, 차라리 그때의 섬뜩한 표정이라도 지으라고 하는 말이 위로 인지도 모르겠지만. 쓸데없이 심란함은 해소되었다. 금성제는 날이 갈수록 내 잔소리는 무시하고 짱개를 함께 먹던 안수호가 하던 짓을 똑같이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약하게 잡아당겨 아프다는 소리가 나오게 하고. 또 그렇게 아프다고 하면 자기 볼을 똑같이 잡아당기라고 얼굴을 가까이한다. 그래서 슬슬,... 한적함이 느껴져 결국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금성제는 괜히 슬픈 얼굴이었다. 그러곤 말한다.
그러면 은장 백사의 허물을 하나 먹은 셈이 되네.
안수호가 허물이라는 말일까. 그런 말은 내가 해야 합당한게 아니야, 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살기 잃은 눈의 그 시선이 느껴진다. 당장 화를 내도 결국 바람 앞의 촛불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저 눈을 감고 다시 그 노을을 생각해본다. 나는 테이프를 건네주고 환하게 미소 짓던 그 안수호의 소유물과도 같던 붉은 노을. 너무 아름다워서 자칫하면 눈이 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 허물. 그래, 허물 맞아. 은장 백사라는 이름도 참 웃긴데,.... 안수호가 허물이라는 건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어. 나와 언제나 함께하지만 실재하지는 않으니까. 내가 먹어치우고 네가 먹어치우니까.
애초에 안수호 이야기를 하지 말았어야하는 걸까.
금성제는 그 날 이후로 심란해 보였다. 멍하게 샤프를 쥔 내 손을 쳐다보다가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문득 나도 궁금해졌다. 왜 나에게 공부를 배우려고 하는건지.
금성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적당한 때가 되면 대답해주겠노라, 약속은 했는데. 또, 그 의미 없는 언약. 직감적으로 느꼈고 아마 그 동물적인 감각은 틀리지 않았나 보다. 그 뒤로 금성제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간 흘려준 연합의 정보는 진실이었고, 나는 허전하고 한적해졌다. 내 허물을 잃은 것 마냥 새벽 두 시에 눈을 감아도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영어 단어를 외우고 좋아하던 그 모습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그때 백과사전을 읽고 나도 탈피를 하냐는 그 질문이 자꾸 떠올라서일까. 답답해서 그냥 집을 뛰쳐나갔다. 딱히 이유는 없었고, 그냥 합리화하자면... 금성제의 여부가 궁금해서?
놀랍게도 금성제는 골목 한 구석에 피투성이 얼굴을 한 채 누워 있었다. 그 때의 싸움 이후로 손을 그렇게 심하게 떤 적은... 처음이었다. 생채기가 잔뜩 생겨 아프다듯이 눈을 찌푸리는 금성제는 미약하게 나를 불렀다.
연시은.
병원 가지마.
아직도 그...새끼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까.
금성제는 아마 연합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이 발각되었나 보다. 타오르던 횃불처럼 굴던 네가 가끔 이런 무기력함을 보여줄 때는 적응이 안 돼. 수긍이 안 된다고.... 그래서 결국 금성제를 힘들게 들쳐 매서 우리 집으로 향했다. 영어 단어를 외우며 뒹굴던 그 침대로.
금성제는 아프다며 연신 입술을 깨물어 신음을 참았다. 어렴풋이 그 때 내가 병원에 입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금성제는 연신 병원 안 가도 된다며,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이 되면 자기를 깨워달라고, 떠나야만 한다고. 그 모습이 너무 간절해 보여서 알겠다곤 했으나... 한적함이 제공한 그 정이 진열장에서 문득 눈에 띈 장난감처럼 내 마음이 아려오게 했다. 나름, 시작은 좋지 않았으나 사람이란 적응의 동물이라. 그렇게 금성제의 생채기를 소독하고 나서 함께 침대에 누웠다. 꿈결에 금성제는 몇 마디를 더 내뱉으려 하듯이 입술을 꿈틀대는 걸 본 것 같다.
너한테는 안...수호가 너무 커 보여서.
주제 없이 내가 끼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러니까, 병원 가지 말라고. 너한테는 안수호보다 더 소중한 허물이란 건 없는 거잖아.
그렇게 금성제는 사라졌다.
너가 먹어치운 허물은 생각지도 못하고 그저 사라졌다.
p.s.
네 마음이 한적해지면 날 찾을 수 있을 거다. 이미 네 추억 속에 진열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찾으려 들지 말아. 나는 첫 순간부터 피식자였으니까.
우린 평등할 수 없겠지, 연시은. 네 세계가 궁금해져서 귀찮은 일 시킨 건 미안하다. 난 그냥 소모품이니까. 근데, 연합을 걸고 하는 섬뜩한 달리기 경기 있잖아... 갑자기 멈추면 아무리 나라도 넘어지게 돼있거든. 넌 시작도 안 한 달리기겠지만 제발 이 초라도 좋으니까, 같이 걸어줘. 달리지 않아도 좋아. 가끔은 네가 나를 알아줬으면 하는 욕심이 너무 커지면 숨 죽이고 있기가 힘드네. 그래도, 네 추억의 진열장에 놓일 수는 있어서 다행이다. 우리가, 다시는 만날 수는 있을까?
* 금성제가 연시은한테 공부 과외받는 게 보고 싶어서 쓰긴 했는데, 금성제는 옥상에서의 싸움 이후로 연시은에게 이유 모를 이끌림을 느껴 필연적으로 곁에 남고 싶은 갈망 때문에 과외를 시작하게 된 설정입니다.. ^^ 캐붕 ㅈ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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