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29. 02:37ㆍ약한영웅
내 얼굴 똑바로 봐, 연시은.
너 지금 떨고 있잖아?
백사는 허물을 남기지 않아. 그저 먹어치워서 흔적을 숨길 뿐, 그런데 네 꼬라지는 왜 그렇냐?
문득 안수호가 생각나는 옥상의 밤이었다. 죽도록 안경잡이를 패고 나서 부들대는 손에 뼈가 으스러지도록, 손톱 자국이 깊게 패일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그 뒤로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요약하자면, 박후민이 피떡이 되어 실신한 나를 안고 병원까지 뛰었고 난 아마 몇 일간을 강제적인 수면에 시달렸을 거고. 고개를 들어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꽤나 볼만한 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 혼자서 꿈을 꾸고 있나봐, 가끔은 안수호의 테이프를 잔뜩 어깨에 매달곤 저 노을의 수평선을 따라 집에 가는 상상을 하곤 했는데... 오늘은 유독 심하다.
이따금 안수호가 미웠다. 논리정연한 사건의 연속으로 가득 찬 회색빛 나의 삶이 가끔은 안수호에 의해서 원래의 색을 찾은 것일지, 아니면 색이 입혀진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그걸 알기도 전에 안수호는 떠났으니까. 한 번 스며든 물감을 도저히 털어낼 수 없어서, 아니면 그냥 네 흔적을 지울 수는 없어서인지. 별을 보자며 내 손목을 끌어 외로워 보이는 저 달을 위로하자며 은근히 미소 짓는 네 얼굴이 기억나서 괴롭다. 이 별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는 달이라 생각했는데, 저 붉은 노을에도 끼지 못한 채 홀로 어두운 무대에 오르는 달이라 정의했는데, 너와 나의 가설은 틀렸을지도. 갑갑한 우물같던 내 삶이 기껏 빛이라는 이름을 달고 인도하는 미소를 따라 갔다니 결국 다다른 곳은... 그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광활한 우주였던 거잖아, 안수호. 너는 내 노을도, 우주도 되지 못할 거면서... 그래서 가끔은 너가 미워. 안수호가 밉고, 네 상실을 매일 재고해야하는 내 처지도 비참하고, 무엇보다... 외롭잖아. 외로워서 나는, 가끔 너가 달을 위로하던 말을 생각하곤 한다고.
이 별의 밤이라는 무대에서는 달이 제일 특별하니까.
그리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무대에서는 너가 제일 특별하니까.
네 빛을 지고 살아가느라 난 백사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간혹 그 이름이 싫어질 때가 더러 있어. 결국 인정해줄 사람, 안수호, 너가 곁에 없는데 난 무슨 의미로, 무슨 가치로 백사라는 타이틀을 단 무대에서 활동해야하냐고. '안수호와 연시은의 짱개 먹방' 무대 정도로는 부족한 거야? 백사는 항상 허물을 남겨. 진정한 포식자가 되려면 백사는 그 허물을 잔뜩 먹어치워 흔적을 싸그리 없애야하는데, 다른 사람은 그런 걸 본 적도 없다듯이 늘상 부드러우면서도 강해야하는데, ...날이 갈수록 너란 허물이 생기는 것 같아서 서글프다. 오늘은 옥상이라는 허물을 먹어치웠어. 한 입 베어물어 형체도 보이지 않게 죄다 씹어먹었다고. 자꾸 안수호에 대해서 무뎌지는 게 거짓말의 연속인건가 싶은데도, 그게 현실이란 게. 이런 날 보면서 넌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당장이라도 존재치도 않을 사후 세계로 달려가 네 멱살을 잡고 간짜장 한 그릇 정도 네 입에 쑤셔넣어서 따지고 싶은데...그게 되겠냐고.
너라는 노을 아래서 테이프를 달랑이며 걷는 달이 되고 싶다.
지구를 별이라고 하는 너라는 멍청이가 미련하다.
결코 그 말을 정정하지 못할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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