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시를 읊는 포식자

2020. 9. 7. 12:33리퀘

보민아, 나 가끔 사랑이란게 정말 악마같다고 생각해. 죽지도 않고 매일 찾아와서 맨날 이렇게 고민하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고... 사랑같은 건 정말 안 하고 싶다가도, 또 걔만 보면 설레고, 잘 안되더라도 옆에 붙어있고 싶고. 세상에 이렇게까지 힘든 게 어딨냐. 난 공부도 못하지만 사랑보다는 공부가 쉽지. 특히 너한테는. 안 그렇냐?

윤산하가 내뱉는 사랑시의 순간들은 늘 가슴이 아린 구석이 있었다. 특히, 자꾸 나 혼자서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자각하게 해줄때마다 그 애가 말하는 악마가 사랑이 아니라 윤산하같다는 생각을 했다. 윤산하는 사랑시를 읊을 때 유독 눈이 반짝거렸다. 맨 앞에 앉아 지리 선생이 뭐라 떠들던 꾸벅꾸벅 앉아서 조는 것과는 꽤 딴판이라 조금 의외였지만, 사랑은 하겠다. 이 말인가 싶기도 했고.

윤산하를 알게 된 건 아마 중학교 2학년 때 역겨운 땀냄새가 잔뜩 나던 남자 중학교에 전학생이 왔다는 의외의 소식 덕이었다. 다른 반이라 그 낯짝을 마주할 이유는 없었다만 굳이 공학에서 남중으로 전학오는 별종은 그 때 흔하지 않았으니까 한번쯤은 얼굴을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감각은 무섭게시리 동물적으로 잘 들어맞는 경향이 있었다. 아마 그 날, 윤산하를 보지 않았다면 나는 내 평생에 걸쳐 허울뿐인 허전한 눈빛으로 살았을 거다. 아버지는 내게 늘 눈빛이 흐리멍텅하다는 그런 개소리를 하곤 했다. 그 때의 나는 무슨 맥락에서 내뱉는 말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그냥 한쪽 귀로 듣고 넘기기만 했다. 하여튼, 윤산하는 전학 온 첫날에만 반짝, 빛나던 그런 유명인이었고 그 뒤로는 딱히 소식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자꾸 윤산하의 반에 발이 묶이기라도 했는지 자꾸 그 별종이 궁금해진다는 본래의 이유를 숨기고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었던 초등학교 때의 동창과 다시 친해져본다는 이유로 친구 몇을 끌고 그 곳에서 함께 떠드는 것이 반이었던 시험공부를 같이 하고, 점심도 먹었지만 굳이 매점에서 피자빵을 사와 위에서 올라오는 토기를 꾹 누른 채 먹기도 했고. 시선 한 켠에는 윤산하가 존재하곤 했다. 항상 안경을 낀 놈과 함께 장난을 치거나 그 놈이 점심시간을 빌어 자고 있으면 하늘을 보면서 은근슬쩍 웃고 있거나. 나가서 축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시인인 것 마냥 밖을 보는 것도 참 별종이라 느껴졌다. 무방비하게 윤산하를 관찰하다가 문득 눈이 마주쳤다. 하늘이 담긴 눈이었다. 바라보고 있으면 괜히 발목을 묶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덫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공부도 못하고 바보마냥 이 알탕에 제 발로 전학 온 윤산하가 공부를 잘하고 성격도 좋았던 최보민 위의 포식자인 것만 같아서,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공교롭게도 다음 해에 윤산하와 나는 같은 반이 되었고 이런 악연이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쭉 이어졌다. 나는 필연인 것 마냥 윤산하의 옆에 내내 붙어다녔고 우리는 항상 서로가 없으면 안된다듯이 굴곤 했는데, 그건 아마 내 쪽만 그랬을지도 모르겠고. 중학교 3학년 때 목도리를 두른 채 그 때 유행하던 노란 노스페이스 패딩을 입고 들어온 윤산하를 보고 안도했는지 절망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단 한가지 기억나는 것은 나는 걔의 옆자리에 꼭 앉고 싶다는 것이었고, 그때 이후로 내가 공부를 잘하는 무의미한 장점이 참 고맙게 느껴졌다. 뻔하지만 나는 공부를 잘한다는 핑계로 사랑시인에게 접근했다. 왜냐하면 윤산하는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거든. 지리 시간에도 자고, 국어 시간에도 자고, 작년에는 하늘을 보더니 올해는 잠만 내리 자더라. 이유를 물어보니 밤새 한 여자애와 페메를 하다 그랬다고. 가슴이 이유 모르게 아렸다. 그 때는 나도 그런 상대가 없어서 심혈관이 가득한 갈비뼈 쪽이 조금 욱씬거렸다는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윤산하는 첫 사랑시를 내게 읊어준다. 자기와 함께 시내 쪽의 맥도날드에 같이 가달라고, 혼자 가기에는 수줍어서... 조금 비참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왜 윤산하와 친구로 지내냐던 인성 터진 선생, 그리고 몇몇의 이기적인 모범생들, 그리고 그런 윤산하도 있었으나 결코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는 사회적 평판으로 인해 뒤집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느 쪽의 마음이 더 큰지.... 더 복잡한지에 대한 문제였으니까. 그제서야 깨달았다. 사냥꾼의 덫에서 빠져나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매미 소리가 난무하던 습기 찬 날이었다. 주말에 윤산하의 옷을 골라주고 항상 어딘가 방향이 다른 앞머리를 정리해주고 나는 시인과 함께 시내로 향했다. 윤산하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빌어먹을 페메 대상이 마음이 바뀌어서, 원래 있던 짝남과 썸을 타게 되어서 윤산하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발걸음을 옮겼으나 그럴리가 있나. 꽤 이쁘장하게 생긴 그녀는 문 밖의 윤산하를 보더니 얼굴을 붉힌다. 그리고 난 그 유리문을 열어주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내 하늘을 봤다. 윤산하가 전학 온 이후 내내 보던 그 하늘에는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어서, 도대체 어떤 기술이 있어서 호구 하나 잘 잡았는지도 궁금해서. 그 때의 마음은 어떤 말로도 정의할수도 없는 어떤 무의미의 결정체였다. 그렇게 집에 돌아가 기계적으로 수학의 정석을 펼쳐 윤산하의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는, 풋풋한 설레임의 악몽을 듣기 전까지는 그냥 풀었다. 그래, 그게 뭐라고. 무슨 의미가 있다고. 피자빵을 먹으며 윤산하를 관찰하기 위해 쏠리는 토기를 억누르려고 했던 그 의지로 하루종일 공부를 했다. 근데 윤산하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대신 나뿐이던 집 현관문의 초인종을 눌렀을 뿐이고.
그 후로 징크스마냥 내가 윤산하를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주던 인연은 죄다 내 쪽으로 넘어왔다. 그 이쁘장한 여자애는 윤산하에게 함께 온 친구는 누구냐고 연신 물었다고 한다. 아무리 윤산하가 바보라 해도 무슨 의미인지는 당연히 알았겠지.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면 윤산하는 여자를 만나러 갈 시간에 나와 함께 공부를 하거나 피방에서 피파를 할 수가 있으니까. 윤산하가 읊는 사랑시는 그 시점부터 꽤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가끔은 내가 싫다며 며칠 간 잠적하기도 했고 하여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서도 운명의 장난인 것 마냥 윤산하는 주기적으로 사랑시를 읊고, 나는 하루종일 그런 날에 수학의 정석을 풀었고. 다만 나아진 것 하나는 윤산하가 공부를 가르쳐달라고 나한테 먼저 애교를 부리는 것 정도? 나와 함께 대학을 가면 매일 내 과제를 베끼겠다는 그런 농담도 했고. 농담이고 비현실적이었지만 윤산하와 함께하는 대학생활도 나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지는 않았지만...하여튼. 하늘을 보는 버릇은 그 때 절정을 다했다. 등교할 때 보는 하늘과 하교할 때 보는 하늘색이 비슷해서 신기하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버릇이 그냥 막막할 때, 그리고 내 옆에서 쫑알대던 윤산하의 사냥 본능에서 벗어나고 싶어질 때로 확장되어서.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아버지는 개소리를 하지 않았다. 눈깔 뜨는 모양새가 마음에 안 든다는 둥, 눈빛이 흐리멍텅하다는 둥... 하여튼 아버지는 그냥 싫었다. 첫 징크스 때처럼 여름의 체취가 난잡하게 얽힌 때가 오자 윤산하는 문득 사랑은 악마다, 라는 소리를 해댄다. 고2 6월 학평 성적은 같은 시기에 봤던 학평의 등급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너무 허전하다고 윤산하는 그랬다. 포식자들은 태평한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네 말 하나에 마음을 졸이곤 했는데, 허전하다는 소리나 해대는 윤산하가 미웠다. 그래서 이제 벗어나야겠다는 능동적 태도를 취하는 시적 대상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은 했다. 근데.... 그게 쉽겠냐고.
그 후로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좆같은 수험 생활 이후로 대학을 가겠다고 원서를 접수하고. 수능을 보러 가고. 면접을 보고. 공교롭게도 윤산하는 수능 성적을 생각보다 잘 받아서 나와 같은 대학을 쓰겠다 날뛰더니 재수하게 되었다.그 후로 악연은 필연성은 가져다 버렸다듯이 끊겼다. 포식-피식의 관계도 끊겼다. 그 애는 여전히 사랑시를 쓰고 있겠지, 하늘을 보며 늘 생각했다. 그렇게 대학 생활 1년을 보내고 나니 신입생 중에 검은 목도리에 노란 패딩은 아니지만... 하여튼. 그 익숙한 하늘을 담은 눈과 자그마치 오 년간 발목을 세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얼굴이 보였다. 비참했다. 평생 너한테 잡아먹히라는 말이지? 난 여자도 만나기 싫고 게임에 중독되기도 싫은데, ...유독 너만 보면 가슴이 아려서. 네가 읊는 사랑시에 중독되었나보다. 웃기지, 사랑이 악마라고 하던 네 시구가 현실이 될 줄은.

사랑시를 읊는 시인은 발목을 묶는 악마의 덫 하나 정도는 들고 있나보다. 불운하게도 그 덫에 묶인 발목은 최보민이었고 선량한 하늘을 동경하던 시인은 악연의 필연성을 우연적으로 갈망하곤 했으니까.

한번쯤은 네 사랑시의 시적 대상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무의미한 발상을 떠올리곤 한다. 여전히 잡힌 채 벗어나지 못하는 피식자에 대해서 한번 쯤은 사유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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