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21. 02:09ㆍ리퀘
대부분 자기만 진짜라고 해, 들러붙은 거짓은 회색빛 현실을 체감하게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둘이 되고, 둘은 열이 되고, 열은 백이 돼. 나는 네게 운명을 걸어보고 싶어. 언니의 삶으로 페인트칠을 하고 거짓을 덧 대 색이 바라지 않게 한 사막같은 내 삶을 넘어 너란 큰 바다를 찾았으니까, 네게 자비를 바라며 운명을 걸게. 너란 큰 바다를 헤엄친다면 본디 내 것이 아닌 삶에 익숙해진 나를 견뎌 결국은....
나는 네 우상이 될게. 설령 그 것이 거짓으로 이루어졌더라도, 내 삶의 통로가 되어줄 널 놓칠 수 없으니까.
길먼은 자신의 실력으로 성공한 '베라' 나이르를 동경한다. 그녀의 눈에는 나이르에게 허락된 오로지 하나의 것은 향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어 자신을 입증하는 것이 보였고, 그녀의 마음 속에는 아리송하게도 또 다른 하나의 미로가 생기는 것 같았으니까. 길먼은 분명 이 곳에 도착했을때 자신의 첫 미로의 탈출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르를 보는 순간 어쩌면 자신이 만들어야할 해답의 통로가 또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고, 그런 '베라' 나이르가 가끔은 자신의 곁에서 어젯밤 자신의 세계를 뒤흔들었던 그 향기 속에서 발견한 모호한 의미를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때까지는 동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뒤엉킨 새로운 미로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신앙적 본능에서 오는 필연성은 가끔 길먼이 그 것이 제 운명이자, 신의 부름이라 혼동하게 한다. 그래서 길먼은 매일 나이르와 밥을 먹고, 산책을 같이 하고, 그녀의 향수를 극찬하고, 가끔 길을 잃을 때는 소리 내어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눈부신 달이 뜨는 밤에 잠자리를 함께 했고, 고유한 그녀의 영역에 침범하고픈 당돌한 사람이 되고도 싶다는 불순한 소망을 순수하게 웃으며 털어놓기도 했다.
나이르는 달랐다.
가끔 나이르는 세계가 답답하다고 느끼곤 했다. 제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삐걱거리던 삶에도 적응했고, 천연덕스럽게 매일 아침 눈가에 작은 점을 찍는 행위조차 더 이상 그녀가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가 되지도 못하는데. 도통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러다 그녀를 만났다. 어머니의 기대가 부담스러웠던 붉은 머리의 그녀는 무작정 제 이야기를 쏟아낸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데. 대강 어머니의 기대가 부담스러워 동양의 나라로 떠나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는 그런 진부하고...아니다. 문득 나이르의 머릿속을 관통해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내 답답함을 해소할 통로가 너가 아닐까? 내 세계는 무채색의 페인트칠 범벅인데, 네 세계는 들어보니 빠르게 터질 것 같이 뜨거운 것 같아. 그녀에게 나이르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의 가짜 성공담. 물론 언니의 옷을 입고 언니와 같은 눈물점을 찍었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지. 그녀는 얼굴색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멋있다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자신도 그런 주체적인...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런 부러움의 말을 한다. 어떤 혁신의 증명에 대한 수동적인 압박이 결국은 능동적으로 누군가의 삶을 빼았었지. 나이르는 씁쓸하게 웃는다. 그녀는 그 날 이후로 무의미하고도 사막같은 나의 세계를 움트는 생명이 가득하도록 가꾼다. 옆에 붙어 있으려고도 하고, 게임이라는 이름의 놀음에 무리하게 나를 구하러 오고. 멍청한 짓이지. 나는 내 세계를 허물어 네 밝은 세계에 기생하고 싶어.
길먼, 네게 내 운명을 걸어도 좋을까?
이제 회색빛 세계에는 더 이상 새로운 기회가 없어. 굳어버린 감각을 너가 바꾸어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끔은 베라 나이르라는 이름을 내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거든. 너의 뜨겁고 터질 듯한 그 세계가 태생부터 길을 잃은 나를 인도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이르는 문득 두통이 느껴져 길먼을 몽롱하게 바라본다. 길먼은 그런 나이르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그녀의 손을 쥔다.
쌍둥이 동생이 있다 했죠. 클로에 나이르라고...
사막에서 겨우 바다로 향하는 통로를 찾았는데, 벌써 알아버린거야? 무의미함의 잔혹이 삶을 다시금 덮치는 기분에 나이르는 눈을 슬며시 감는다.
걱정하지 마요, 베라... 나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요. 나의 우상, ...나의 사랑.
그래. 그렇게 나를 도와줘, 우린 결국 이어져 있다는 걸 너도 결국은 깨달았구나. 무한의 우리에게서 움트는 생명의 생동감에 눈을 살짝 떠 길먼의 뺨을 쓰다듬어 본다.
반 괴로움, 반 안도감의 모순적 표정을 짓던 길먼은 그제서야 미소를 짓는다.
어젯밤 내가 꾸었던 그 꿈의 혼돈 속 미로가 다시금 해결되었구나. 길먼은 피가 나는 나이르의 입술에 슬며시 제 입술을 맞춘다. 반복되는 매일에 자비가 내리도록 하소서, ...신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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