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심장은 흐르는 피조차 따뜻할 수 없다

2020. 8. 23. 19:19리퀘

아리스토텔레스는 멍청하게도 뇌가 아닌 심장이 인간의 사고를 담당하는 기관이라 했었지. 

차가운 심장이 인간의 행동 혹은 사고를 지배한다면, 결국 그 사람은 차가운 사람이 되는걸까? 

결국 그 심장에 흐르는 피 또한 인간의 체온을 지닐텐데. 

 

가끔은 그 여자가 생각날 때가 있었다. 바깥이 내 손의 온도만큼 차갑게 내려앉아 온통 그녀의 머리칼을 닮은 흰 눈발이 날아다니던 그런 겨울에 그 여자가 생각날 때가 있었다. 기억나는 건 도통 조각조각 찢어져 있어 딱히 회상할 만한 그런 껀덕지는 없었으나 적당히 기억이 날 만도 한데, 잘 나지도 않으니 성가시게 하는 사고의 귀퉁이라는 말을 붙여본다. 다만 뚜렷하게 기억나는 그녀의 한 마디는 뭐랄까, 약간 충격적이라 할 수가 있었다. 술 같은 건 입에도 대지 않았을 것 같은 하얀 머리색의 그 여자는 레몬 진을 한 병 들고 오더니 화사하게 웃으면서 이름도 모를 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오페라 가수라며, 어울리지 않는 거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나왔던 것 같기도. 그러다가 심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전에 그 이름 모를 학자는 인간의 생각은 뇌가 아니라 심장에서 하는 거라고 했다. 그녀는 그 말을 하더니 미쳐버린 것 마냥 얼굴에 잔뜩 홍조를 띄고 잔뜩 웃음을 터뜨린다. 휘청이는 그녀의 허리를 잡은 하얗게 질린 내 손이 꼭 그녀의 머리칼과 겹쳐 보여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그런다. 

 

나는 가끔 아리스토텔레스가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차가운 심장을 가진 당신은 차갑게 행동하니까?

 

그녀는 또 다시 미친 사람마냥 웃는다. 그러곤 시간이 되었다듯이 자신의 팔을 걷어낸다. 신선한 피를 마셨던 적이 언제적이었나, 생각을 해봤다. 적당히 인상을 찌푸린 그녀는 내 잇자국을 보더니 괜히 쓰다듬어보는 듯 했다. 그러곤 얼어붙을 것 같은 바깥의 공기를 마시고 싶다고 한다. 우리 사이에서 바깥에 나가는 건 금기 같은데? 모자를 쓰라고 한다. 하얗게 질려 붉은 것이 잔뜩 보이는 내 얼굴이 징그럽지도 않은지 실실 웃으며 말을 한다. 체온을 나누고 싶다며 모자를 푹 눌러쓴 내 손을 꽈악 잡는다. 도대체 무슨 체온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나지막히 따뜻하다는 말을 한다. 그 날은 꼭 자기 말을 잘 들어달라고 하니까. 그 말을 듣지 않으면 괜히 그 하얀 꽃이 얼어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인간에 대한 혐오를 눌러 담은 정으로 그 날은 유순하게 잘 따라주었더니 저런다. 그러자 괴상하게 생긴 나무에 빨간 것, 노란 것, 하얀 것, 그리고 양말 따위를 잔뜩 달아놓은 것을 보고는 다시 그 미친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곤 안아달라고 한다. 얼음같은 심장의 차가움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며, 내 피부색보다 어두웠던 베이지색 코트로 서서히 파고들어 제 몸과 내 몸을 밀착한다. 시계탑의 종이 두어 차례 울렸다. 여자는 나가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제 스스로 품에서 기어나오더니 먼저 가봐야할 것 같다며 깍지 낀 손을 풀고 흰 눈발 속으로 사라졌다. 허망하게 남겨진 베이지색 코트 위의 그녀의 체향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충 마른 장미 향 같기도 하고, ...그냥 비릿한 피 냄새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그 날 후로는 그 여자를 볼 수 없었다.

가끔은 이상 종족의 차가운 심장에 질렸나 싶다가도,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얼음같던 감촉이라...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따뜻한 피를 마시려고 만난 게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그 날 그녀의 조그만 몸에서 느껴진 격동적인 차가운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혈관을 동경했을지도.

차가운 심장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다. 

창백한 피부색을 버리고 그녀와 만날 때 모자를 쓰고 싶지 않다. 

첫 줄은 잊어버려. 가끔 그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온 몸이 차갑다는 걸 자각할 때마다 그녀를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기억은 조각 조각 찢어진 게 아니라, 온전한 기억 속에 그녀를 향한 갈망이 찢어져 녹아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틀렸다. 

차가운 심장에서 따뜻한 피는 흘러나오니까,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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