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2020. 10. 11. 20:29리퀘

이성에서 비롯된 감각들이 흩어져 여기저기 나뒹구는 꼴이 참 우스웠다. 그저 싸움에 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흥분해서는 이기지도 못하는 싸움에 덤비는 모습에서 피한울은 절대 지고 못 사는 성격인 것 정도는 알게 했고, 그 후로는 내 앞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어색한 대인배 행세를 하곤 했다. 가끔은 그 오만한 콧대를 꾹 눌러주고 싶었지만 주위의 2학년들이 피한울을 바라보는 시선이 신경 쓰여서 그런 짓은 그만두기로 했다. 피한울도 나름 피한울의 삶이 있었을 것 아냐. 그가 저지른 악행은 정말 용서할 수 없었으나 여럿의 제 3자들까지 가세해 악당을 괴롭히는 건 내 방식이 아니었으니 다시 그 경고를 무시한 채 말을 걸면 아주 그 입술을 짓뭉개 손 쓰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어이없게도, 피한울은 내가 차이나타운을 습격한 연백을 박살낸 그 날 이후로 그답지 못한 제안을 해왔다. 조직에 들어오라니, 뭐라니. 일자무식인 나도 선악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고. 내 무의식 아래 깊은 곳에서 폭발하는 분노를 인내하지 못한 채 피한울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그 주위에는 나에게 이런 취급을 받을 줄 알고 데려온 수족이 몇 잇었으나 가끔 모두가 상상하던 돌발 상황이 갑작스럽게 찾아오면 예방하기 힘든 경우가 있으니까. 피한울은 입가의 피를 스윽, 닦아내고는 웃기게도 아까의 말을 반복한다. 

 

"조직에 들어와. 값은 톡톡히 쳐줄테니까."

 


윤가민은 다시 그 상황을 떠올리며 미간을 짚는다.

피한울이 다시 자신에게 악행을 권유하자 이미 상처가 나 채 아물지도 못한 왼쪽 뺨을 후려친다. 둔탁한 소리가 냉기만이 감도는 어두운 창고에서 여러번 일어 괜히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뒤늦게 저항하기 시작한 피한울은 혼신을 다해 발악을 했으나 역시 윤가민은 윤가민인갑다,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 윤가민은 바닥에 늘어진 채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인지, 괜히 괜찮은 척을 하는 건지 모를 조소를 짓는 피한울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세게 쥐며 섬뜩한 음성으로 말한다. 닥쳐, 진 주제에 입만 나불대고 있어. 피한울은 점점 목에 느껴지는 악력 덕에 인상을 찌푸리다 별안간 눈물을 글썽인다. 놓, 놓으라고. 놓으라고! 눈가에 붉은 기가 도는 피한울의 얼굴을 흘끗 보고는 윤가민은 그의 목을 쥔 손을 느슨히 하였으나 아예 떼어놓지는 않았다. 피한울은 그제서야 켁켁대며 상실한 호흡의 리듬을 다시 찾는다. 눈물의 의미는 그저 생존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연기를 해서 상황을 타파해보려고 한 것인가. 윤가민은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려 답을 찾으려고 했으나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다. 순식간에 창고에 피한울의 수족들이 닥쳐 문을 거칠게 열어제꼈다. 도련님! 따위의 말을 외치며 자신에게 무기를 겨눈 채 달려오는 인간 덩어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 저에게 위해를 입히기 전, 피한울은 다시금 그만 멈추라 한 쪽 손을 올린다. 

 

그 후로 피한울은 윤가민에게 조직으로 들어오라는 권유를 하는 것은 단념했다. 

 

대신, 피한울은 윤가민을 볼 때마다 목을 졸라 눈물을 글썽였던 기억이 떠올라 그에 대해 복수하고자 만나는 족족 그의 얼굴에 상처 한 톨이라도 내려고 했으나 윤가민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피한울의 움직임을 그 0점짜리 머리로 어떻게 예측하는 건지, 그의 동작을 죄다 꿰고 있었다. 그가 왼쪽 상단에서 주먹을 날리면 묵직한 그 힘을 버텨내고 오히려 반동에 의해 피한울이 넘어가게 한다. 그가 오른쪽 하단에서 태클을 걸어오면 가볍게 중국 무술 특유의 동작으로 빠져 나온다. 재능은 다른 것인가? 피한울은 사유했다. 끝없이 고민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모두의 위에 군림하는 것이 이치라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가 윤가민에게 행하는 모든 동작의 형태는 불완전했다. 재능을 부여받은 놈과 재능을 소유하지 못한 놈, 그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목에 남은 공포스러운 악력은 다시금 그와 단 둘이 대치했을 때 다시 발동하곤 했다. 가타부타 말 얹을 것도 없다며 윤가민은 피한울에게 대뜸 제 앞에서 사라지라고 말한다. 그러곤 다시 피한울의 목에 손을 대는데, 본능의 학습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제 지위도 모른 채 눈물을 다시 글썽이는 피한울의 모습은 가히 윤가민에게 충격적이었다. 물론 그 때는 생리적 현상이라 넘어갈 수 있었다 해도, 이번은 그저...공포에 굴복하는 먹잇감의 모습이었다. 윤가민은 그대로 피한울의 목을 조르던 그 느낌을 되새기는 건 그만뒀다. 대신, 입술에 흐르는 피를 보고는 눈을 찌푸리며 무거운 입을 뗀다. 

 

"그만해. 어차피 날 못 이기는 것 정도는 알잖아."

 

무섭게 주먹이 날아왔다. 윤가민은 미련한 자존심이 아직도 남아있을 것 까지는 예측하지 못한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입술의 혈흔을 소매로 대강 닦아내며 피한울 앞에 나란히 섰다. 

 

"내 앞에서 또 그렇게 울어봐. 그때처럼 봐줄 것 같아?"

"헛소리 하지 마라."

 

사나운 맹수를 가장한 목소리는 전혀 위협적이지 못했다. 윤가민은 코웃음을 치더니 피한울을 벽으로 밀치고는 섬뜩하게 그의 귀에 속삭인다.

 

"영 점짜리 머리, 성적, 그리고 학교서 그들을 만나게 된 건 행운이야. 그깟 목을 조르는 것에 굴복하는 너 따위가 방해할 일은 아니라고. 나를 이기고 싶다면 그런 나약한 모습부터 청산하고 오는 건 어때? 멍청하게 굴지 말고."

 

피한울은 할 말이 없다듯이 그저 꾹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맹수인 척 했던 발칙한 여우가 탈을 벗는 꼴이었다. 결국 모두의 위에 군림하는 건 제 앞의 윤가민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피한울은 이만 부득 부득 갈며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는 달달 떨기만 한다. 아버지의 말씀은 소용이 없었다. 피한울은 태생부터 모두를 지배할 포식자가 될 그릇이 안 되었다. 제 앞의 윤가민은 이제 존재 자체로만 그를 굴복하게 만들고, 무릎 꿇게 만드는 존재가 되었다. 감히 도전하기에는 본능적으로 익힌 공포가 그의 손을 제지했고, 그를 넘어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발을 움찔거리게만 만들었다. 나약한 자존심은 결국 무너지길 마련이었다. 이성은 자신의 지위를 생각하라 소리 치고 있었으나 결국 인간 또한 동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다듯이, 피한울은 윤가민의 다리 아래에 쓰러지고 말았다. 눈을 감은 채 지친 육신은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고 그저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다며 무책임하게 굴었다. 제 뒤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에 윤가민은 고개를 살짝 돌려 포식자가 되고 싶었던 나약한 여우를 바라본다. 필히 온 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한기가 지배하는 이 계절에서는 저 나약한 여우가 다 못한 복수를 받아내지도 못한 채 죽을지도 몰라 싶어, 청색의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리며 윤가민의 팔 위로 안착했다. 윤가민은 제 위의 몸뚱아리를 바라보며 손을 쥐었다 편다. 하얗게 질린 저 목을 조른 그 느낌이 아직도 생경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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